· 홈 > 구불길 안내 > 구불3길 큰들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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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들길은 작촌마을의 깐치멀농촌체험마을에서 시작한다. 구불길을 따라 까치처럼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자연과 정겨움이 가득한 곳이란 주제로 표현한 공공미술작품을 감상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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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벽돌을 지나 창오리쪽으로 걸으면 산곡마을을 지나 고봉산 등산로로 만난다.
고봉산에는 예전에 미군기지로 사용되었던 곳이 있고 이곳을 지나 아산마을로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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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오초교 인근에 위치한 도예원은 도자기가 연출하는 색다른 변화를 감상할 수 있고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인 도자기를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도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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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가옥은 고봉산을 넘어 아산마을 안쪽 깊숙한 곳의 대나무숲 뒤에 마치 숨어있는 듯이 있다. 가옥 앞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면서 가옥을 지키려는 듯 한 나무들이 여러 그루가 있고 안채의 우측 뒤편 높은 곳에는 양반가의 유교식 전통에 따라 집안에 마련하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사당이 설치되면 그 순간부터 집안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생활하는 생활방식이 적용되어 자손들은 집안의 대소사나 원거리 여행 출입시 필히 사당의 조상님께 먼저 고해야 했으며 이러한 죽은 조상에 대한 효도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뛰어 넘어 조상 또한 자손이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믿음을 낳았다.
또한 집 앞쪽에 있는 사용하지 않는 빈 기와집은 본래 가마곳간의 위쪽에 있던 또 하나의 사랑채였으나 채원병씨의 작은 아버지가 현재 위치로 옮겨 생활한 집이라고 한다. 이처럼 본래 모습을 다 볼 수는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군산에서 가장 돋보이는 전통가옥인 채원병 가옥은 각각의 공간이 서로 나뉘어져 있으면서도 툇마루로 연결되는 특이한 공간구조와 훌륭한 전통 조경을 볼 수 있는 군산지역 양반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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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월령마을을 통과하면 건물 입구의 자연석에 새겨진 진남정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진남정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진남정은 활을 쏘는 사정(射亭)이다.
진남정에서는 국궁을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사전예약 필수 063-452-8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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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정 옆의 탱자나무 길을 돌아가면 깔끔하게 정리된 최호장군전시관이 있으며, 다시 진남정 앞을 지나 원발산마을로 내려가면 최호장군의 사당인 충의사(忠義祠)가 있다.
군산에서 낳은 임진왜란의 영웅인 최호 장군은 조선 중종 27년(1536)경남최씨 최치원의 15대손 최한정의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곳은 현군산시 개정면 발산리로서 어머니 광주김씨가 장군을 잉태하였을때 넓은 호숫가에서 백마가 놀다가 집안으로 힘차게 달려오는 꿈을 꾸었기에 호수 호(湖)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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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장군유지를 둘러보고 발산초등학교 쪽으로 가면 '총각바위 넘어뜨려 떡이나 얻어먹자'라는 농담이 있었다는 대방마을 선돌이 있다.
이곳에서 발산식당을 지나 발산초등학교 뒤에는 발산리 유적지가 있다.
발산리 5층 석탑과 석등은 이곳 농장의 주인이었던 시마타니가 오직 희소성 있는 골동품에 대한 소유욕만이 앞서 인근의 소작인들을 동원하여 마이산 기슭의 완주군 삼기리 봉림사터에서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불법을 자행하며 옮겨온 문화재들이다.
발산초등학교에는 석조유물들 말고도 관심을 끄는 건물이 있는데 그 대상은 용도가 금고로 이용되었던 3층의 금고형 건물이다. 초등학교가 시마타니 농장이었던 시절에 만들어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금고형 건물은 발산리 석조유물 전시장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6.25가 일어나고 이른바 인민공화국시대에 그 특이한 모습 때문에 군산 옥구지방 우익인사들을 감금하는 감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발산리의 유물들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아픔을 대변하는 근대 문화유물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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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장산마을로 향하다 등산로로 접어들면 얼마 올라가지 않아 오줌바위약수터가 있고 약수터에 구불구불하면서도 아름다운 대방산 산책로 따라 걸으면 대야면소재지가 나온다.
대야에는 군산시의 유일한 5일장(양력으로 끝자리가 1일과 6일에 열리는 장)이 있는데 대야장 또는 지경장으로 불린다.
장소는 전라선이 지나고 군산-전주 벚꽃 백리길이 만나는 대야삼거리 일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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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남고교를 지나면 저 넓은 대야들이 나오는데 나포 십자들과 같이 이곳에서도 소비자단체가 뽑은 최우수 브랜드 쌀인 큰들의 꿈이 생산되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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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들을 가로질러 있는 군산-전주간 전용도로 옆 길을 따라 걸으면 옥홍마을이 나타나고 이곳을 지나면 옥산맥섬석허브한증막이 나온다.
옥산맥섬석허브한증막 은 주위에 허브들이 많이 심어져 있어 허브의 향기가 하루의 피로를 씻어 주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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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 가옥
성산면 고봉리 고봉산 기슭에 위치한 과거 이 지역 부농의 주택이었으나, 행랑채 등 많은 부분이 헐려져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사당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각 방이 나뉘어져 있으면서도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공간 구조와 뛰어난 조경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풍수지리적으로 이 집의 터는 고봉산의 지맥이 마치 지네와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 혈맥이 바로 이 집안으로 흘러 들어와 이 집의 중심부가 지네의 어금니에 해당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안채의 건립 연대는 철종 11년(1860)이며 사당은 광무 5년(1901)에 지었다. 이 가옥의 조경수법은 대문 안쪽의 안채가 직접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차면 화단이 꾸며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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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정
1921년에 이 고장의 유림, 유지와 한량들의 발기로 현 경암동인 옥구군 경포천변에 건립되었는데 하천이 자주 범람하므로 1928년에 월명동의 위치에 옮겨 세워졌다고 한다. 이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집이었다. 그 후 신축되어 개정면 발산리 월령마을 최호장군 유적지 내의 2,500여평의 대지에 120여평 규모의 2층 건물로 전통과 현대식의 절충형으로주건물은 현대식이 고 사대는 목조기와의 전통 양식의 정사 건물을 2003년 착공하여 2006년 3월 26일 준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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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장군유지
최호장군유지는 사당, 무덤과 전시관으로 되어 있으며, 사당은 1729년에 최호장군의 후손이 만들었으며 1906년에 다시 지었다. 최호 장군은 1536년 임피현 발산에서 태어나 무장인 아버지 최한정에게 무장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고, 커서 1574년(선조 7)에 무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다시 무과 갑과에 급제한 후 무장으로 뛰어난 활동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의주로 피난갔을 때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왜병의 정예부대와 싸웠고 1596년 충청도 병마수군절도사로 있던 선조 29년(1596)에 이몽학의 난을 바로 잡았으며 정유재란 때(1597)에는 칠전량 해전에서 싸우다가 전라우수사 이억기, 조방장, 배흥립과 함께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가 사용한 유품과 선조가 그의 공을 기념하여 하사한 삼인보검을 보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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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산리 5층 석탑과 석등
보물 제276호인 석탑은 신라탑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고려시대 석탑으로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지에서 일제시대 시마타니가 반출하였다. 보물 276호로 지정된 발산리 5층 석탑은 한눈에 보기에도 전형적인 신라계통 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석탑임을 알 수 있는데 탑의 건립연대는 옥개석의 짧은 추녀와 부분적으로 간략화 시킨 특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탑임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발산리 5층 석탑이라는 이름처럼 본래 5층 석탑이지만 현재는 4층만이 남아있다. 5층 석탑과 함께 시마타니에 의해 완주군 삼기리 봉림사에서 옮겨진 석등은 석탑과 같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발산리 석등은 보물 234호로 지정된 문화유산답게 보물이라는 표현 그대로 첫 느낌에도 강한 힘과 부드러움이 절묘하게 융화된 예술 작품임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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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타니 금고
발산초등학교에는 석조유물 말고도 금고로 이용되었던 3층의 금고형 건물이 있는데 초등학교가 시마타니 농장이었던 시절 만들어진 건물로 일제의 우리 문화재 약탈의 상징적 건물이다. 반지하인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어진 3층 건물인데 외부로 통하는 창문에는 쇠창살을 치고 그 바깥쪽으로 철물을 달아 2중의 방범장치가 되어있다. 또한 출입문은 육중한 금고 문을 달아 놓았는데 금고 문에는 USA마크가 선명하게 있는데 미국에서 수입한 수입품임을 알 수 있다. 반지하에는 옷감과 음식류가 있었으며 2층에는 농장의 중요서류와 현금이 있었고 3층에는 한국의 고 미술품이 다수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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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마을 선돌
군산지역의 경우 확인된 선돌은 6기(발산리 1, 사정동 1, 미산리 2, 하용정 2)이지만 남아있는 선돌 중에 일명 총각바위라 불리는 발산리 대방마을 선돌은 높이 1m 35cm의 뾰족한 날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인근 삼수마을 주민들이 제례를 올리는데 그 이유는 선돌이 쓰러지면 대방산의 음기 때문에 마을 처녀들이 바람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때문에 혹시 총각바위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삼수마을 사람들이 바위를 다시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이때 대방마을 사람들에게도 떡과 술을 대접하며 총각바위를 잘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때문에“총각바위 넘어뜨려 떡이나 얻어먹자”라는 농담이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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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장
대야장은 일명 지경장으로 불렸는데 어원은 남내리에 있는 고개인 지재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이곳 지재는 옥구현과 임피현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경이라고 불렸는데 지금도 과거에 지경장이 열렸던 장터마을이 있다. 남내리의 지경장은 소금장과 우(牛)시장이 컸다고 하는데 장날에는 회현과 옥산에서 사람이 많이 모는 장소였기에 일본 경찰의 주재소도 자리하고 있었다. 이 지경장은 일제시대인 1912년 호남선의 지선인 군산선이 대야를 통과하게 되면서 시장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대야로 옮겨가며 시장의 명칭도 따라가서 본래 배달메라 불리던 대야가 지경리라 불리게 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지금도 1일과 6일에 5일장으로 서고 있어 장날이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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