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구불길 안내 > 구불2-1길 미소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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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소길은 용의 고장 임피를 지나 만경강과 접하고 있는 김제와 소통하는 길이다.
- 임피가 왜 용의 고장인지는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 15년 5월 20일 세종대왕께서 신하들에게 하교하여 물어보기를 “용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태종대왕 때 용이 밭 가운데서 솟아 나온 일이 있다고 하는데 용도 동물일진대 밭에서 나왔다고 하니 괴이하지 않은가?라고 말하니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신들이 알기로는 충청도 평택, 아산, 전라도 만경, 임피, 용담 등지에서 용이 간혹 나타난다고 하오니 널리 물어 보시면 직접 본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그 근거로는 용과 관련된 지명들로 서수면사무소(당시 임피면) 인근에 있는 용전(龍田), 용성(龍成), 용회(龍回), 용귀(龍歸)마을 등이 있다.
- 임피는 역사와 문학의 고장이다. 출발지점에 임피향교, 노성당이 있고 잠시 걷다보면 근대시기 대표적인 소설가인 백릉 채만식의 출생지이다.읍내에 생가터만 남아있지만 인근에 집필터와 묘소가 있다.
읍내를 지나 남산 산책로는 사계절 중에 가을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데 남산은 임피읍성을 중심으로 남쪽에 위치하여 남산으로 불렸고 봉수대가 있었다.
- 군산은 금강과 만경강에 위치하여 백제시대에는 사비성과 고려시대에는 진성창을 조선시대에는 왜구약탈을 막기 위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 성곽과 봉수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턱에 남산 문턱재 하녀헌샘(물이 조금씩 나옴)이 있고 포강 옆에는 남근암이 있는데 이 바위를 건드리면 남산에서 피가 났다는 전설이 있고 이 약수(약수에서 솟아는 샘)는 소화불량·위장병에 효험이 있고 피부병·신경통·안질·빈혈증·만성부인병 등에도 약효가 있다고 전하고 심지어는 두뇌가 명석하여진다는 설도 있다.
- 남산을 내려오면 호원대학교 월포제를 만나게 되는데 칡덩굴이 많아서 갈운리라 불리는 상갈마을 서쪽에 있는 연못이다.
호원대학교는 서황(捿凰)마을에 위치하고 있는데 봉황(鳳凰)을 길들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문서당이란 곳이 있다. 문서당은 조선초기 문회선생이 건립했으며 많은 유생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고 호남에서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가는 사람들이 임시 쉬어서 가는 휴식처로도 이용했다고 한다. 이에 걸맞게 이곳에는 호원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 다음 목적지는 임피역이다. 술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술(戌)자는 '개'라는 한자이고 산山자는 '뫼'라는 말이다. 이 마을 좌우에 '청룡' '백호' 두 혈(穴)이 있다 하는데, 이 큰 혈맥 때문에 꼼짝 못하고 개가 엎드려 있는 모양새라 한다.
- 임피역사는 1912년 호남선의 지선으로 완공된 군산선에 위치하며 1936년 건립되었다. 본래 임피면 읍내리에 만들어졌어야 하는데 읍내리의 유림(儒林)들이 기차가 지나가면 산이 끊기고 기차의 운행진동으로 임피지역의 기(氣)가 훼손된다는 풍수지릭적 이유로 반대하여 술산리를 경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철도가 놓인 뒤 지독한 질병과 재앙을 치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역을 지나 논길을 터벅터벅 걷다보면 소달구지 쉼터가 있는데 이곳이 신털메마을이다. 이곳 공창들은 대야(배가 닿는 곳인 배달매, 큰 들)와 임피(용의 고장)가 만나는 곳이다. 과거 고려시대 말 12조창의 한 곳인 진성창과 조선시대에는 군산창(칠읍해창)이 있어 임피에서 가을걷이가 끝나면 수확한 쌀을 소달구지에 싣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군산으로 이어지는 행렬이 눈에 보인다. 각 고을 관리와 수행 포졸 그리고 마부들이 여행의 피곤함을 잊기 위하여 주막에 들러 여독을 풀며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 접산(蝶山)리 라궁마을은 뒷산이 나비처럼 생겼다고 해서 나브메 또는 접산이라 하였다. 주산은 청용산으로 탑천강이 흐르고 있으며 상류에는 황등, 하류에는 입석 마을이 있다. 라궁마을 논두렁에 위치한 정자는 가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논에 있는 이삭들은 마치 나비의 날개 짓을 하는 모양을 한다.
- 탑교공원을 가로 지른 전국 최초의 2차선 도로인 전군간(전주-군산)도로는 1908년 10월 개통되었고 군산의 근대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일본군 군수품의 원활한 보급 목적과 전라북도의 쌀을 군산으로 운송하는데 편리하게 하고자 도로를 만들었다. 즉 쌀 수탈의 길이라 볼 수 있다. 전군도로의 통과 지역은 전주-동산촌-대장촌-목천포-대야-군산의 코스 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전군도로가 통과한 지역이 대부분 일본인 거대 농장들(구마모토, 미야자키, 시마타니, 모리지쿠 등)이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 광교리 원두마을은 조선조 약 750년 정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을 원님이 살았다하여 원두라 칭하였으며 광교(光橋)라 함은 넓은 다리가 있으므로 너분다리 또는 현 탑교에서 거목으로 다리를 놓았다 해서 거목다리라고도 했다.
광교리 신광마을은 조선조때(16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자연마을 입석은 300여년전 선돌이 있어 마을 이름을 입석이라 한다.
광교리 상광마을은 좋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중광마을은 광교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고, 하광마을은 광교리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하광이라 명하였다.탄천강 양쪽에는 억새와 갈대가 있어 그 아름다움을 다하고 잉어, 메기, 붕어 등이 많이 서식한다.
- 이 길의 마지막 마을인 신창마을은 김제시와 연결되는 곳이며 약 200년전 조선후기에 마을이 형성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하여 신창이라 불렀다. 만경교가 없을 때 나룻배가 강을 건넜다. 만경강은 길이 200리 상류는 임실군 상관이 되며 폭은 약 900m이다. 고려말이나 조선 초기에 추정되는 비석이 신창마을 내에서 벽여미터 제방밑에 있었으나 장지리 입구쪽 도로변으로 옮겼다. 신창에는 새창(새챙이)에서 청하면 갈산리로 건너는 나루로 유명한 신창진(새챙이 나루)이 있고 쌀 창고가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신창진은 임피현의 중요 포구였던 곳이으로 옛 비석이 서있었고 입석이 있었다고 전하는 오래된 포구이다. 군산시 대야면 복교리와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를 잇는 다리가 만경대교인데 이 부근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신창진(新滄津)이란 포구로 불려왔다. 이곳은 군산으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김제평야에서 나는 쌀을 가져가기 위해 만든 나루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교통량이 많아지자 1933년에 시멘트로 다리를 놓았는데, 이 다리를 '새창이다리' 또는 만경강을 건너는 다리라고 하여 만경교라고 하였다. 다리가 노후화되고 교통량이 늘어나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1988년부터 폭이 넓고 튼튼한 다리를 놓기 시작하여 1989년 2월 개통하였다. 숭어가 많이 잡히고 동자개 등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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