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구불길 안내 > 구불2길 햇빛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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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자연학교에서 햇빛 길을 따라 서수 쪽으로 가면 불주사(예전 명칭 불지시와 혼용)입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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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주사가 자리한 장상리에는 일명 고산골이라 불리는 원장산 마을과 군인이 주둑했다고 하여 이름 붙은군둔마을 그리고 본래는 잠버들이라 불리었으나 이 마을이 기와를 구웠다고 오른쪽으로 백인농장이 있다. 젖소와 송아지에게 먹이를 주고 함께 놀며 반추동물을 배우고 유제품 발표과정과 시식을 할 수 있는 열린 체험 공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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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농장을 지나면 군둔마을이 있고 고사리로 유명한 망해산을 주제로 한 공공미술을 감상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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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농장을 지나서 올라가다보면 축성산 불지사라는 현판이 달린 일주문을 만날 수 있다.부처님이 항상 머물었다는 뜻의 불주사는 일주문에서 조그만 올라가면 망해산의 동쪽 중턱에 있다. 산비탈에 축대를 쌓은 후 사람을 배치하였는데 전체적으로 청정하고 단아한 분위기이다. 최근의 중창불사로 큰 주차장과 자연석으로 만든 웅장한 돌계단을 갖추어 엄숙함이 풍기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17호 불주사 대웅전과 관음전, 나한전 등이 있다.
불주사에서는 주말에 구불길을 여행하는 도보영행객에게 무료로 점심식사와 차를 제공한다. (식사 사전예약 필수 Tel)063-451-1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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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주사 뒤편으로 난 좁다란 등산로를 올라가면 망해산이 나타나고 이 곳에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동쪽 능선을 따라 걷는 등산로가 있고 능선을 따라 걷는 등산로가 있는데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편하게 산책하듯이 걸을 수 있다.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고 금강과 나포십자들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명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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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매운탕 옆으로 축성산을 빠져나오면 축산제가 있고 이 곳을 지나 1921년 개교한 임피초교 쪽으로 가면 이방청(노성당), 300년 된 나무와 연지, 그리고 선정비, 임피향교를 비롯하여 옛날 역사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임피초교를 지나면 전통한옥 두 채가 보이는데 하눈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세월의 고색 창연함이 물씬 풍기는 팔작지붕의 건물은 조선시대 임피지역 향리들이 근무했던 이방청이다.
임피현의 관아건물 중유일하게 남아있는 이방청은 현재는 노성당이라고 더욱 알려져 있고 최근까지 읍내리 성내마을의 경로당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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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당을 지나 임피향교로 오르다보면 좌측으로 조그마한 연못을 배경으로 옛 비석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 고을이나 현청의 앞에는 그곳 관아에서 근무한 수령들 중 공이 많은 사람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서있기 마련인데 이곳에도 총17개의 비석들이 선정비 및 영세불망비라는 명찰을 달고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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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향교는 조선 후기의 소규모 향교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대성전은 공포의 양식이나 초석 등에서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연구할 부분이 많은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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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향교에서 채만식도서관 앞을 지나 읍내리로 나가면 백릉 채만식선생의 생가터가 있다. 1902년 6월 17일 채만식 선생이 태어난 임피 읍내리의 274번지는 얼마 전까지 비디오 가게를 통해야만 안채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간판만 있고 영업은 하지 않아 출입이 자유롭다. 선생의 집은 엄밀하게 말하면 생가라기보다는 생가터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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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리에서 임피하수처리장 쪽으로 농로를 따라 걸으면 서해황토방이 있고 그 앞에서 좌회전하면 깐치멀농촌체험마을이 있는 작촌마을로 갈 수 있다.
깐치멀농촌체험마을은 까치처럼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자연과 정겨움이 가득한 곳이란 뜻의 녹색농촌체험마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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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주사
불주사는 군산지역의 사찰 중 유일하게 일주문이 있었던 사찰이다.
가운데 대웅전이 자리하고 동북쪽에 벽안당(혹은 관음전)이 있고, 대웅전의 동남쪽에는 나한전이 있는 구조이다. 1986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1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주심포계팔작지붕 건물로서 최근에 단청을 새로 하였는데, 조선시대 양식의 건물이다.
블주사라는 명칭은 무엇일까? 불주사라는 명칭은 이 사찰의 뒷산 모습이 석가모니불이 설법하신 인도의 마갈타국 왕사성의 영축산과 흡사하다 하여 축성산이라 부르고 절의 이름도 깨달음을 얻으라는 뜻에서 불지사라 한 것이지만 본래 명칭은 불주사 즉 부처가 있는 절이라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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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당
노성당은 읍내리 임피초등학교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변은 구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이방청이었는데 임피 장날을 정하고 물가를 정하는 사람을 지정하였으며 신창진(새챙이 나루터)의 입출항 선박을 통제하는 기능도 있었다고 한다.
1905년 이후에는 일본 경찰의 주재소로 사용되었고 그 후 임피의 유지 이동석이 매입하여 양로당으로 쓰도록 노인회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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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 및 선정비
조그마한 연못을 배경으로 옛 비석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을 볼 수 가 있다.
어느 고을이나 현청의앞에는 그곳 관아에서 근무한 수령들중 공이 많은 사람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서있기 마련인데 이곳에도 총17개의 비석들이 선정비 및 영세불망비라는 명찰을 달고 서있다. 비석들 뒤쪽으로는 오리가 놀고있는 연못이 있다.
연못의 가운데에 인공섬을 만들고 버드나무를 심어놓았는데 버드나무가 묘한 모습으로 누워 자라는 바람에 연못 전체의 운치가 더하는 듯하다. 인공으로 조성한 이곳 연못은 언제 누가 만들었으며 연못의 이름이무엇인지도 전해지고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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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란교
옥란교는 논 경지정리로 지금은 사라졌지만 읍내리 서남쪽 800m 지점의 논 한가운데 있던 돌다리였다.
유래를 보면 조선중기 광해군때 임피현으로 귀양을 온 선비가 있었는데 임피현령에게 그를 외딴섬으로 유배시키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임피현령은 귀양 온 선비와 절친한 친구라 섬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에 가슴 아팠다고 한다. 그렇다고 조정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어 사또는 밤마다 고민하였다고 한다. 그때 사또의 딸인 옥란낭자가 기발한 묘안을 제안했다. 읍내에서 멀지 않은 성 밖에 연못을 파고 그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든 후 아버지의 친구를 그 섬에 유배시키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날라주기 위해 연못의 섬에 돌다리를 만들었으니 사람들은 이 다리를 뛰어난 발상으로 아버지의 고민을 해결한 옥란낭자의 이름을 따사 옥란교라 불렀다는 것이다. 지금은 연못도 옥란교도 모두 사라지고 우정의 소중함을 전하는 전설만 남아 있는데 선정비 뒤에 있는 연못의 모습이 온란교의 전설과 유사하여 다시금 살펴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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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향교
임피향교는 1403년(태종 3) 현 경산리 교동인 대정동에 창건되었는데 1630년(인조 8)에는 현 미원리인 서미곡으로 이건되었으며 1710년(숙종 36)에는 현재의위치인 장유동으로 옮겨 다시 세워졌다. 1974년에는 대성전이 중수되었고 1975년에 명륜당이 보수되었다.
임피향교는 조선 후기의 소규모 향교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대성전은 공포의 양식이나 초석 등에서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연구할 부분이 많은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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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릉 채만식
채만식선생은 자신의 고향인 군산을 배경으로 1930년대 암울한 삶을 그려낸 장편소설 탁류를 만날 수 있다. 백릉 채만식선생은 임피면 읍내리 274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중퇴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를 역임하였고 1925년 단편 "세 길로"가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고, 1943년에 "레디 메이드 인생" "인테리와 빈대떡"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 기반을 굳혔다. 그 뒤 단편 "차숙" "소망" "예수나 믿었더면" "지배자의 무덤"등 풍자성이 짙은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대표적인 장편 "탁류"는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사건을 놓고 사회의 비리를 풍자한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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